"비(B)…마지막은 에스(S)인 것 같은데…모르겠어요."중학교 1학년 영어 문제를 한참 들여다 보고 있던 정희(14.여.가명)가 고개를 저었다. 올해 중 2가 되는 정희는 'BUS(버스)'의 U(유)자를 끝내 읽지 못했다. 정희는 "영어 시간에 선생님 설명을 하나도 알아듣지 못한다"고 말했다.
정희의 꿈은 자꾸 변한다. 처음엔 꿈이 없었다. 가족 누구도 꿈에 대해 얘기하지 않았다. 초등학교에 들어가 처음으로 "꿈이 뭐니"라는 질문을 받았다. 친구들이 얘기한 꿈을 따라서 말했다. 4학년이 되면서 꿈이 생겼다. 화가.요리사…. 지금은 가수가 되고 싶다. 그러나 정희는 곧 말을 바꿨다. "가수는 돈이 있어야 하니까…그냥 미용 그런 거 배워 자격증 따고 돈 벌어야죠."실업계 고등학교에 진학하는 오빠 정원(16.가명)이는 꿈을 접었다. 합기도 선수가 되고 싶었지만 도장 다닐 돈이 없어 1년 만에 그만뒀다. 정원이가 도덕 시간에 쓴 학습활동지의 목표 세우기 난에는 첫 번째 목표가 '대충하기'였다.
◆교육 소외=10평 남짓한 정희네 집(인천 부평)에는 편히 앉아 공부할 공간이 없다. 베란다에 장판을 깔고 만든 정희 방은 추워 겨울이면 5분을 앉아 있기 힘들다. 안방의 절반은 할아버지 침대가 차지하고 있다. 10여 년 전 정희 부모가 집을 나간 뒤 막노동으로 생계를 꾸려가던 할아버지는 2년 전 뇌경색으로 쓰러져 산소호흡기로 생명을 이어가고 있다. 병 수발하느라 할머니는 정희 숙제 챙겨줄 엄두를 못 낸다.
학교 수업뿐만이 아니다. 걸어서 5분 거리의 학교에 다니는 정희는 버스를 어떻게 타는지 모른다. 아이들 돌보기가 어려웠던 할머니는 가능하면 아이를 집안에 머물게 했다.
시골은 더 심각하다. 본지 조사에 따르면 전교생 중 최소 10~20%가 조부모 가정이었다. 전남 신안 비금초등학교의 최정인 교사는 "집에 전화할 때 '부모님 계시니' 대신 '어른 계시니'라고 묻는다"고 말했다. 하교는 곧 방치지만 강사를 못 구해 방과 후 교실 운영도 힘들다. 한 교사는 "부모가 숙제 챙겨줄 여력이 있는 가정은 도시로 떠나고, 남아 있는 아이들은 하향 평준화된다"고 말했다.
◆희망의 씨앗="선생님, 이건 어떻게 풀어요?" 울보였던 주현(9.여.가명)이는 요즘 부쩍 질문이 늘었다. 1년여 전에는 지레 '못한다'며 혼자 떨어져 있기 일쑤였다. 주현이는 글을 모르는 할머니와 함께 사는 아이다.
전남 진도 조도초등학교 관사분교에선 전교생 7명 중 2명이 조부모 가정이다. 2004년에는 9명 중 5명이었다. 3년 전 서울에서 온 민구(9.가명)는 "우리 엄마 도망갔어요"라고 말해 교사를 놀라게 했으나 지금은 공부 잘하는 모범생이다.
변화는 집안의 빈 자리를 학교가 채우면서 시작됐다. 2004년부터 2년간 이 학교에서 일했던 이근희 교사는 아이들과 함께 목욕하고, 잠도 같이 자며 엄마의 빈 자리를 채웠다. 지난해부터 학교를 맡은 김남경 교사는 오후 5시30분까지 아이들을 학교에 머물게 하며 보살핀다.
학생 수가 많은 도시에서도 지역 사회의 역할이 중요하다. 제주도 서귀포가정폭력상담소는 독지가의 도움을 받아 지난해 4월부터 조부모 가정 아이 16명에게 학습지 교육을 하고 있다. 6학년인 형수(13.가명)는 처음에는 교사의 방문을 피했다. 나눗셈.곱셈도 서툴렀다. 물건을 훔치다 경찰서에 불려다니기도 했다. 그러나 요즘은 "선생님, 더 있다 가세요"라고 말하는 날이 늘었다. 학습지 교사 김명숙(40.여)씨는 "일주일에 한 번이지만 관심을 갖고 지도해 주는 사람이 있다는 점이 학습과 생활에 도움이 되는 것 같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전문 상담교사 배치, 교육받은 봉사자를 활용한 '대리 부모' 제도 등이 필요하다고 지적한다. 박남기 광주교대 교수는 "취약 가정에 컴퓨터만 지급하고 관리해 주지 않으면 밤새 컴퓨터를 하느라 수업 시간에 잠만 자게 된다"며 "행정업무 부담을 확 줄여 교사가 학생을 심도 있게 관리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야 한다"고 말했다. [중앙일보 2007년 01월 08일(월) 발췌]
작성일 : 2007-03-13 
